창공의 마법사, 시니어드 킬리언

Cinaed Killian, Magus of Caelum

 

  늘 불만이 있는 것처럼 찌푸린 미간, 안경 너머로 경계하는 의심 가득한 눈빛. 아카데미 시절의 시니어드 킬리언은 늘 가시 박힌 방어막을 한 겹 두르고 사는 사람이었다.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한숨을 쉬고, 그 뒤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면 자못 딱딱한 어조의 말을 내뱉는다. 그의 말은 항상 목적이 분명하고, 대화는 결코 길게 이어지지 않으며, 그마저도 끝이 나면 가차 없이 자리를 뜬다.

  이런 벽을 세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시니어드 킬리언은 항상 눈에 띄는 자였다. 카르비나 제국 북부에 있는 작은 왕국 세브레스의 더욱 작은 도시 얀 마옌에서 평민 집안의 셋째로 태어난 그는 왕국에서 매해 단 한 명만 선발하는 마법특기생으로 제국 제일의 마법 아카데미, 모나한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평민 출신의 마법사가 으레 걷는 공학자의 길 대신 연구자가 되겠다며 나선 당돌한 신입생은, 그곳에서 입학 첫 해 통합과정 전 과목 수석을 달성한다.

  하지만 시니어드 킬리언의 명성은 그가 작은 도시 출신의 외국인인 탓도, 그의 야망 혹은 그에 걸맞는 성적 때문도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1년이 갓 지났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원하던—제 딴에는—조용한 생활을 이룩했노라 자부했었다. (어릴 적의 그는 부끄럽게도 오만한 구석이 있었고, 학우들의 입에 제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겼다.) 안타깝게도 그가 만끽하던 완벽한 평화는 이듬해, 레테 리베레츠를 만나며 깨진다. 제 인생 가장 끈질긴 악연이라 칭하던가. 그 뒤로 그는 진정한 의미로 학교의 유명인사가 되고 만다. 붉은 머리의 동급생이 벌이고 다닌, 아카데미를 시끄럽게 한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에 몇번씩이나 휘말렸으니 말이다. 그라면 절대로 발을 들이지 않았을 사건에 휩쓸려 평판에 흠집이 나고 있으니, 어린 모범생에게는 꽤나 뼈아픈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레테 리베레츠와 엮이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악연은 레테가 제적을 당할 때까지 이어졌다. 불행히도 그의 동급생은 도발에 능했고, 끌고온 화젯거리들은 시니어드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너무나도 적절했기 때문이다.

 

  시계를 돌려 15년 후, 만 31세. 사뭇 부끄러운 학창 시절도 빛바랜 추억으로 여길 수 있게 되었을까. 얇게 묶은 머리카락은 이제 허리까지 닿는다. 불만이 깃든 미간과 피곤한 기색이 선연한 얼굴은 여전하나, 어투는 제법 누그러졌다 할 수 있겠다. 만성적인 불면증 탓에 생긴 다크서클 위로 눈꺼풀이 느릿느릿 내려앉는다. 그는 이제 아카데미 2학년 마법시연회 때와 같은 고출력 마법은 웬만한 각오 없이는 사용하지 못한다. 체내의 마나회로가 손상된 탓이다. 아카데미 졸업 후 왕국과 제국 간의 조약에 따라 의무복무기간을 채워야 했던 그는 불행히도 로바니에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 차출되었다. 전쟁은 길지 않았으나 200여 년 간 이어진 평화의 시대가 깨졌다는 충격은 모두가 기억할 테다. 그때의 불안한 분위기가 여전히 대륙을 감싸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이라면 모두를 지켜낼 수 있을 거라 믿던 오만함은 전장에서 무참히 깎여나가, 핏물과 함께 쓸려나갔다. 실습과 전쟁은 아주 달랐다. 그 사실을 그는, 수많은 패배와 상실 끝에서야 깨달았다.

  그러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영광도 그에겐 달갑지 않았다. 종전 후 온갖 명예가 줄줄이 붙어 나온 자리들을 걷어찬 그가 택한 것은 고대마법 연구의 길이다. 한때 의무복무기간이 끝나면 할 거라 상상했던 일 그대로.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몸이 멀쩡하지 못하다는 것과 가끔 거절하지 못할 의뢰가 들어온다는 것일 테지만, 그럼에도 오랫동안 갖지 못했던 평화를 드디어 되돌려 받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놈의 거절하지 못할 의뢰 탓에 제 발로 제 오랜 숙적을 찾아갈 때까지는⋯ 말이다.


  창공학파의 길을 택한 시니어드 킬리언은 마나를 있는 그대로 다루는데에 능하다. 체내 마나량과 화력은 평범할지 몰라도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컨트롤과 빠른 계산 속도는 따라올 자가 없다. 본래라면 미리 새겨진 마법진이나 여럿의 고위 마법사가 필요한 복잡한 마법식도 혼자서 시전해낸다. 로바니에라의 새로운 공격 마법에 대응하는 광범위 방어 마법을 즉석에서 만들어내어 요충지를 지켜낸 일은 지금도 제국의 전투 마법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나.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시니어드 킬리언은 비관적이지도 매정하지도 않다.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것은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겠지만, 그의 퉁명스러운 어조에 항상 자신감과 확신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기도, 선택에 대한 자신이기도, 또 고집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백 번 받으면 백 번 그렇다 대답할 인물이다. 앞으로의 항로를 조정할지언정 이미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지는 않는다. 그것이 자신의 최선이었고, 재수없는 말이지만 그보다 잘 해낼 자는 흔치 않으니 말이다. 비탄에 빠진다면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지, 결코 틀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비관은 적확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습관에서 기인한 오해이고, 종종 표출하는 피곤함은 대체로 자신이 고난에 스스로 걸어 들어갈 것을 예상하고 있는 탓이다.

  그는 부정하나 그가 무리하는 것은 대체로 타인을 위한 것이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라온다 했던가. 그는—다소 오만할지라도—자신이 큰 힘을 가졌음을 일찍이 인지하고 있었고, 그 탓에 쥐어진 책임에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 없다. 쉬운 일은 쉽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어렵기 때문에 나선다.